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1차 북벌 (문단 편집) ==== 장제스의 하야 ==== >"나는 혁명의 한 부분이고 혁명은 나의 한 부분이다. 도저히 완전하게 은퇴할 수는 없다." >---- >하야 이후의 [[장제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장풍합작이 이뤄지면서 북방에 기대할 것이 없게 되고 장제스의 군세가 산동 지역에 진출한 틈을 타서 6월 23일, 우한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반장, 난징 타도를 주장하던 탕성즈가 난징 진격을 명령했고 [[장파쿠이]], [[청첸]], [[주페이더]]가 동진하여 7월 17일에 안휘에 진입했다. 이에 장제스는 북벌을 중단하고 난징 방위를 위해 북벌군을 후퇴시켰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군벌 쑨촨팡이 역습하여 장제스 군대를 밀어내고 난징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7월 24일 쉬저우가 다시 함락되었고 장제스가 직접 독전했음에도 열세가 두드러져서 결국 쉬저우 전선 전역에 걸친 총퇴각이 이루어졌다. 쑨촨팡의 공세에 밀린 탓에 장제스의 정치적 지위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7월 29일 하성준을 베이징에 보내 양위팅과 담판하고 휴전을 모색했다. 이에 양위팅은 봉천 군벌과 난징이 연합하여 펑위샹을 같이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공산당 뿐만 아니라 장제스 역시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장제스를 총사령관에서 동부군 사령관으로 좌천시키자는 주장이 군사위원회에 제기되기도 했다. 7월 15일 분공을 결정했던 우한 정부는 공산당을 몰아내는 청당 작업을 실시하면서 펑위샹을 통해 난징 정부에 평화적 해결을 제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우한 정부는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난징의 리쭝런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징웨이는 우한 정부도 이제 반공을 표방하고 있으니 난징 정부와 우한 정부는 근본적으로 대립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고 탕성즈는 아예 8월 8일 전국에 '도장'을 타전하면서 장제스에 대한 공세 고삐를 쥐었다. 리쭝런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장제스는 우한을 설득해보려 했으나 입장이 완강하여 실패했다 한다. 이에 장제스는 이때 다음과 같이 썼다. >"시국의 분규와 내부의 복잡함은 남도 북도 모두 같은 모양이다. 단지 냉정하게 기다렸다가 기회를 보아 움직이면 최후의 승리를 얻지 못할 일이 없다!" >---- >8월 11일 장제스의 일기. 8월 12일에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회에서 왕징웨이의 주장에 넘어간 바이충시, 리쭝런 등 광서파는 우한과의 합작을 위해 장제스의 사퇴가 필요하단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쭝런은 "장 총사령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 주었으면 싶다."라며 사직을 요구해왔고 쑨촨팡과의 싸움에서의 패배, 우한의 압력, 자신의 편을 들기는 커녕 우한과 합세하려는 광서파의 태도를 점검한 장제스는 결국 하야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오직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나의 행동을 정하겠다."고 표명한 장제스는 바로 국민정부군 총사령직을 사퇴함을 알리는 사표를 국민정부에 제출하고 난징에서 상하이로 떠났다. 이때 [[우징헝]], [[장런제]],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등 5명도 '장제스와 진퇴를 같이 한다'는 명분으로 동반 사퇴했다. 다음날인 8월 13일, 장제스는 미리 준비해둔 사직선언을 낭독하며 영한합작을 위한 3가지 지침을 발표했다. ||1. 쌍방의 동지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외부로부터의 도발을 배제하고, 서로의 의심을 일소하는 일이다. 우한의 동지는 하루라도 빨리 난징으로 집합하여 당국대정의 진행을 꾀해 주기 바란다. 2. 호남, 호북, 강서에 분주해 있는 우한 동지는 힘을 합해 북진하여 진포선 연선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군대와 합류, 일치단결하여 국민혁명을 달성해 주기 바란다. 3. 호북, 강서, 호남의 제성에서는 철저하게 청당을 실시하기 바란다.|| 조지 소콜스키 기자는 "몇분 동안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여 아무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라고 당시 기자회견의 상황을 묘사했다. 다른 사람이 우한과 난징의 합병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발언을 하기 시작하자 장제스는 회의장을 빠져나가 즉시 임시 기차를 타고 난징을 떠나 상하이에서 자문들과 상의한 후 고향에 칩거했다. 뉴욕타임스의 미셀위츠는 시커우 마을의 절에 기거하던 장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침착해 보였고,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는 생판 다르게 긴장과 피로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비록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는 정치적 패배를 당했으나, 장제스의 친위 부대가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에 고루 주둔해 있고 펑위샹, [[옌시산]] 등의 실력자들이 장제스 옹호의 입장을 취하며 그의 사직을 반대하는 등, 그의 입장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제스를 지지하며 난징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던 청방과 절강 재벌들은 장제스의 하야에 발맞춰 자금 제공을 끊어 난징 정부의 경제난을 야기했다. 장제스 하야 이후 난징 정부의 월수입이 800만 정도였는데 장제스가 거둬오던 재벌들의 지원은 월 2천만에 달했었다. 또한 광동파가 장제스의 편에 섰다. 광동파 리지선이 시국선언을 발표, 바이충시와 리쭝런을 비롯한 광서파를 비난했고 이 때문에 리쭝런은 7군장직을 사퇴했으며 그 후임은 친장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광서 후방의 제15군 역시 친장파에 넘어갔다. 이후 장제스는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 외유를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